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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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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의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에는 ‘간격’이라는 시가 나온다. 그 시에는 숲을 이루는 나무는 어깨와 어깨가 맞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격이 있다고 설명한다. 바로 그 간격들이 있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게 한다고 시인은 자신의 깨달음을 묘사하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위에서 시인이 묘사한 간격을 통해 숲을 만들기 보다는 어깨와 어깨가 맞대어져서 숲을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도 어떤 모임에서 그런 일을 경험했다. 회원들은 개성이 있어서 자신만의 간격을 존중받아야 하는데 새로 임원이 되신분이 타인의 간격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지시하며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쉽게 비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무들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다가 잘 죽는 것처럼 간격없는 나무를 만들려는 시도는 숲을 파괴시켰고 몇 그루의 나무를 상하게 하여 모임이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 개개인을 나무라 생각하고 그 사람이 모인 체계가 숲이라고 본다면, 그 숲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문학회가 될 수도 있고 또 작은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사람 개개인의 간격을 존중함으로 체계를 이루어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서 체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할 때는 부딪힘은 있을 수 밖에 없고 숲의 좋은 환경은 파괴되어진다. 


가정에서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을 찾아가느라 부모와 간격을 두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간격을 독립된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당연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아이의 정서가 조금 더 잠잠해 질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 부모를 찾아올 때 까지 기다려 준다면,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숲은 여전히 아름답고 더 질서가 잡혀 나갈 수 있는데, 그 간격을 가족 간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신호로 여기며 다시 간격이 없는 어깨와 어깨를 맞댄 관계로 돌아가자고 요구하기 시작할 때, 가정이라고 하는 숲은 휘청거리기 시작하게 된다. 나무가 자라면서 성장할 때 마다 화분 갈이를 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어릴 때는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어서 부모와 어깨를 맞대고 살았지만 사춘기가 되면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스스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활동하려고 한다. 그 때 간격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는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함으로 간격을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간격이 있는 행복한 가정숲을 이루는 방법이다.


지인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딸 하나를 둔 부모가 있었는데 딸이 시드니로 대학을 갔다고 한다. 그러자 부모가 시드니로 이사를 했는데 아이가 한 학기를 마치자 학교를 멜번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자 부모는 함께 멜번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아이가 이번에는 휴학을 하고 아예 한국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부모는 또 한국으로 따라 들어갔고 한국에 있던 아이는 얼마되지 않아 다시 호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로 끊임없이 어깨와 어깨를 맞대려고 하나 외부사람의 눈에는 ‘그 딸이 얼마나 숨이 막혔으면 계속해서 부모를 떠나려고 할까!’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처럼 간격이 없이 밀착된 관계가 어떻게 관계를 힘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는 지를 우리는 보게 된다.


부부 관계에서도 간격이 중요하다. ‘너와 나는 간격이 필요없는 한 몸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있는 정화되어지지 않은 감정을 그냥 막 배우자에게 쏟아놓는다면 배우자는 한 몸이 아니라 쓰레기통이 되어지는 것이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이라고 하는 체계를 이루어 살지만 거기에서도 건강한 간격이 필요하다. 내가 가장이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가족이 다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나무만 생각하고 배우자나 가족의 다른 나무의 특성과 성장 환경과 필요의 부분은 무시하는 사람이다. 어깨와 어깨를 맞대는 나무를 요구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나무에 붙어서 기생하는 나무들만 일방적으로 원하는 사람인 것이다. 적당한 거리가 있으면서 서로의 온기를 함께 느끼는 부부는 함께 숲의 비전을 공유하며 숲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개성, 즉 다른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존중해 준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간격도 사회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최근에는 사람과 사람의 간격을 너무 중요시 여기다 보니 그 간격이 너무 넓어져서 따스함과 온기를 잃어버리고 나무 하나 하나가 개별적인 숲을 이루어가는 느낌도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너무나 어깨와 어깨를 맞댄 관계들에서 상처를 많이 입고 이제는 가까이 가는 것조차 피하게 되어서 양극화된 모습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게 되면 집안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집의 모습이 어떠하든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는데 요즘은 이야기를 들으니 집 가까운 카페에서 목사님을 만나고 심방을 받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라도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자신의 간격을 고수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따스함을 추구하는 모습은 귀하나 어떤 면에서는 온기를 조금 더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조금은 더 다가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사람과의 관계를 잘 조절을 못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조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면 과하게 의존을 하면서 계속적인 요구를 하게 된다. 그렇게 갑자기 간격을 좁히면서 다가오니 상대방은 부담스럽고 그 관계에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점점 힘듦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적당한 관계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거절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섭섭함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변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이제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 안경을 부정적 안경으로 바꾸어 끼면서 상대방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게 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런 관계의 패턴을 가지고 있으신 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간격이 어떤 것인지를 사회적 관계에서 재학습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 자신의 간격이 타인에 의해서 쉽게 침범 당했기에 건강하고 적절한 간격을 지켜 나가고 또 친밀한 관계에서 그것을 적절히 세워 나가는 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무와 나무의 간격이 숲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건강한 공동체의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간격이 필요하다. 그 간격을 지켜 나가기 위해 때로는 “No”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한 발걸음 더 다가가거나 한 발걸음을 더 뒤로 물러서야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적절한 간격을 위해 다가감이 필요한 지, 물러섬이 필요한 지, 또는 ‘아니요‘ 나 ‘예’가 필요한 지를 살펴보고 건강한 숲을 이루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햇빛과 바람이 비출 수 있도록 적절한 간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호주기독교대학 김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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