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숙 칼럼리스트

가체(加髢) - 보다 높이, 보다 크게, 보다 화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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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라이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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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인데 높은 신분의 여성들이 높고, 크고,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모습을 보면 내 어깨가 눌러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그 무거운 가발을 가체라고 부른다. 조선 역사에서 여성들의 가장 비싼 머리 장식품 이었던 가체, 귀족 신분의 여성이나 기생들이 주로 사용했었던 일종의 미용 장신구로 여겨진다. 가체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일반인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실례가 있다. 2009년 경남 하동에서 발생한 일로서 조선 중기 정3품 무관이었던 정희현의 두 번째 부인의 묘 이장을 하면서 잘 보관된 미라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길이가 130cm에 달하는 땋아 올린 머리가 보존된 채로 함께 발굴된 것이다. 본인의 머리 길이 80㎝에 덧붙인 가발이 50cm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여성들의 머리 장식에 대한 사치는 도가 지나쳐서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기도 했다. 영조 26년, 그 당시 쌀 한 가마니가 3냥이고, 기와집 한 문이 20냥이었는데, 반면에 가체 하나의 가격이 60~70냥 정도 되었다. 수요가 늘어나자 400~500냥까지 올랐고 보석이 달린 가체는 1000냥을 넘었다고 하니 과히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가체가 일반 평민들에게도 상용화된 것은 조선 후기지만 가체는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남아있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장발의 여인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고구려 안학 3호 고분벽화에서 가체를 쓴 귀족과 그들의 하녀들을 볼 수 있다. 가체를 사용하는 풍습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왕족과 귀족 여성, 기생에 한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정조 시대에 가체의 패해가 심해지자 정조는 “가체신금사목”을 발표했지만 법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못했다. 그 당시 조선은 실학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경제 발전이 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가체 금지령은 신하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법으로 억제하면 경제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강력한 제지를 하지 못했다. 정조의 금지령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정치적인 목적과 귀족 여성들의 미용에 쓰였던 가체가 사회적 문제로 커지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가체 파동까지 일어났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지만, 병자호란 이후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신분질서의 붕괴, 그리고 서민 문화가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서민들의 경제력과 신분이 상승하며, 상류층 여성이나 기생들의 전유물이었던 가체는 일반 서민 여성들의 생활에도 스며들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 때에 이르러 가체는 쪽 찐 머리의 유행이 번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가체는 지나친 사치와 무조건적인 유행을 따랐던 그 시대 여성들의 잘못된 풍속이었을까.


말썽 많았던 가체, 이제는 지나간 역사 속의 여성들이 사용했던 머리 장식품의 하나로서 역사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유행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 서울 한복판에서 무거운 가체에 각종 보석 장신구를 머리에 매단 멋쟁이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는 날이 올는지도 모르겠다.

 

황현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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