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숙 칼럼리스트

뒤돌아보는 시간

작성자 정보

  • 코리안라이프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새해가 밝으면 한 해의 목표를 정하고, 늘 그것을 이루겠다는 맘으로 서두르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직선의 달림보다는 곡선으로 둘러가는 여유를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싹튼 것은, 지난 가을날, 바깥으로 긴 시간 동안 돌아다녔던 해외여행의 피로감 탓인 듯하다. 아직도 내 몸과 마음을 붙들고 있는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여행은 항상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기회도 되지만, 후유증은 몸의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올해는 삶을 억지로 밀어 올리기보다 조심스레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모든 일에는 도착을 기다리기보다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상의 작은 틈에서 잠시 멈추어 서면, 소소한 기쁨이 내 안에 쌓여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일월을 시작해본다.


연초에 휴식하는 동안,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다양한 볼거리를 보았고, 넷플릭스에서 좋은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보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 보는 것을 참으로 즐겼다. 그 이유는 예술적 성향을 지녔던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영화 관람이나 창극을 공연하는 극장에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그 영향으로 영화 애호가 된 나는 좋은 영화와 멋진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게도 애정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 국민배우로 인정받던 안성기 배우의 안타까운 타계 소식을 들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 「얄개전」은 아마도 그의 초기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변함없는 그의 팬으로서 그가 출연한 많은 영화를 봐 왔다. 그중 「종이꽃」은 브리즈번 한국영화제에서 만난 작품이었다. 그 영화는 연기에 대한 평가를 넘어, 가슴에 ‘쿵’ 하고 남는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과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 「작은 꽃」에 대한 감동은 여전하다. 한 배우가 남긴 시간과 얼굴을 떠올리며, 안성기 배우가 주연한 영화 「작은 꽃」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이 영화는 2020년 10월에 한국에서 처음 개봉된 영화로서 제53회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 백금 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윤성길(안성기 배우)은 종이꽃을 접으며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장의사이다. 말수는 적고, 그의 삶은 힘들고 메마른 편이다. 그의 곁에는 의대에 다니다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아들 윤지혁이 함께 살아간다.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서로의 마음에는 좀처럼 닿지 못하는 어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 온 싱글 맘인 은숙과 초등학생인 딸 노을이 서로 이웃 관계가 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사고 이후 지혁은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여러 번 자살시도를 하며 세상과 등진 어두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윤성길은 이웃집으로 이사 온 은숙을 아들의 간병인으로 고용하고, 그들은 서로의 생활에 점점 영향을 주며, 윤성길 자신도 잊고 있던 삶에 대한 희망과 인간적인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은숙은 성격이 명랑하고 늘 노래를 부르며 사는 고운 심성을 지닌 여자이지만, 그녀의 얼굴에 있는 칼자국의 상흔은 불행했던 그녀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은숙은 늘 웃는 모습으로 지혁에게 용기를 주며 “넌, 할 수 있어.”라는 희망적인 의지를 심어준다. 결국, 혼신을 다한 연습으로 혼자서 휠체어에 앉을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며, 서로의 삶에 위안이 되어주는 순간이 찾아온다.


종이꽃은 장의사의 시선으로 한국사회의 변화와 숨어있는 사회적인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비교, 가정폭력 그리고 아직도 다 밝혀내지 못한 광주 민중항쟁의 어두운 역사를 마치 뒷골목을 비춰주듯이 조금씩 들춰내서 보여주었다. 윤성길은 왜, 종이꽃을 만들어서 장식하느냐는 노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꽃이 귀하던 시절,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구별 없이 누구나 그들의 상여에 마지막으로 달았던 꽃이 종이꽃이었다. 그 안에 담긴 뜻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평등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귀함이다.”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종이꽃은 가장 인간다운 꽃,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마지막 순간에 누구에게나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윤성길은 훼방꾼으로 인해서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지만 결국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장의사로 되돌아온다.


나는 문득 장엄했던 친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생각났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어린 눈으로 보아도 아주 거창하고 웅대해 보였다. 할아버지의 상여는 온통 화려한 종이꽃으로 뒤덮였으며, 백여 개가 넘는 깃발로 인해서 길을 가득 메우는 긴 행렬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가시던 그 시골길의 풍경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금도 바래지 않아, 어느 순간 기억 속에서 한 편의 영화처럼 조용히 겹쳐져 왔다. 영화장면 중에 마음에 와닿았던 한 대사가 기억난다. 노을이는 학교수업 중에 아이들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산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장의사가 되고 싶다고.” 순진하고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꿈을 당당하게 밝혔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장의사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인생의 끝자락에 주어지는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깨우침으로 받아들였다. 은숙은 절망에 빠진 지혁에게 “죽고 싶다는 소리는, 살고 싶다는 외침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배우 안성기의 안정되고 무게 있는 중후한 연기는 보는 내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삶과 죽음, 인간애와 희망을 담백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 영화로 안성기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볼 수 없는 안성기 배우의 연기가 그리워질 것만 같다. 


한 편의 좋은 영화는 교훈을 전해주며 나의 시간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인생이 더 나은 삶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종이꽃”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바로 그런 영화라는 울림을 받았다. 연출가는, 삶이란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겸손의 여정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글 : 황현숙 칼럼니스트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10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