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숙 칼럼리스트

용서, 사랑, 그리고 화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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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라이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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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하던 겨울의 잔재가 어느새 끝자락에 다다랐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속에는 계절이 마무리되는 고요함이 스며 있는 것 같다. 살갗을 스치는 냉기에 몸과 마음은 여전히 움츠러들지만, 이 계절의 끝자락이 주는 차분한 정취에 잠시 머물게 된다. 이런 날이면 따뜻한 온돌방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씹으며 소설 한 권을 펼치는 풍경이 그리워진다. 땅콩 맛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이곳의 겨울쯤은 너끈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눈물이 나는 감동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오래전 한인 성당에 손님 신부로 방문했던 월터신부님의 따스했던 강론 내용이 생각난다. 월터신부님은 교도소 재소자들을 사목하며 돌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분은 특히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원주민 수감자들을 사목했었다. 신부님은 그 날 미사 강론 중에 특별한 두 원주민(Aborigine)의 삶을 이야기해서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실화는 지금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있으며, 겨울을 견디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준다.


- 첫 번째 원주민의 용서와 화해 이야기 -

브리즈번(Brisbane) 더턴 파크(Dutton Park)라는 지역에는 한때 교도소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 장소가 자취를 감추고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 시절 그곳 감방에는 젊은 애보리진 죄수 한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감방의 작은 창문 너머로는 기찻길이 보였으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언덕에는 매일 같은 시각에 그의 애인이 찾아와서 손을 흔들며 사랑을 전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죄수는 칼을 든 낯선 남자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간절하고도 필사적으로 손짓하며 그녀에게 위험을 알렸으나, 애인은 그것을 더 간절한 사랑의 신호로 착각했다. 그 순간 기차가 지나가며 시야를 가렸고, 다시 눈을 돌렸을 때 그녀는 언덕 위에 쓰러져 있었다.


젊은 원주민 죄수는 창살에 매달린 채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살인범이 같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면회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분노와 고통은 충분히 겪었기에 복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내가 회개하고 바깥세상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언덕에서 나에게 매일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당신에게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용서란 이렇게 사랑으로 시작되었다.


- 두 번째 원주민의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 -

존(John)이라 불리는 나이 든 원주민 죄수는 감옥 안의 정원에서 장미밭을 돌보며 지냈다. 정성스레 가꾼 장미는 향기를 퍼뜨려, 차가운 감옥 안을 부드럽고 향기롭게 물들였다. 존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그는 성실히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았다. 그의 수감 방안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그는 다른 죄수들의 고통을 함께 들어주며 기도해 주었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물었다. “저 나무에 달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왜 저렇게 큰 고통을 받았습니까?” 존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이곳에 있지만, 저분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졌습니다. 저분의 사랑에 응답하려면 기도와 속죄로 참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의 삶과 말은 장미 향기처럼 퍼져가며 감옥에 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름날 장미꽃이 만발하던 어느 날,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나와 화해를 하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강론을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유를 잃은 교도소 안에서도 세상 밖의 위선보다 더 고결한 삶을 살아낸 두 원주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의미를 전해준다. 호주 정부는 여전히 원주민 토지 소유권 문제로 흔들리고 있다. 순박한 친절이 교묘하게 이용당했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가 된다. 그들의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다시는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겨울은 끝자락에 있지만, 그 속에서도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기억은 잔잔한 장미 향기처럼 스며들어, 덮어 줄 것이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글 : 황현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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