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숙 칼럼리스트

그저 느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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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라이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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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된 지 바로 엊그제 같았건만 훌쩍 이월의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계절의 흐름을 재촉하며 다음 시즌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듯하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는 이름 모를 은은한 꽃내음이 묻혀오며 코끝에서 머문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한가운데에서 유유히 흐르는 브리즈번강 위에는 하얀 쾌속정 시티캣(City Cat: 시의회에서 제공하는 페리)이 시원스럽게 물살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단돈 50센트로 브리즈번시의 남북을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최고의 유람선 같은 보트이다. 빙고, 불루이 같은 만화 캐릭터로 분장한 배들도 있다. 브리즈번의 거주자들이 누리는 호사라고 생각한다. 갑판 앞쪽에 서 있는 낯선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거리의 길손을 유혹하고 있다. 그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나는 이끌리듯이 시티캣에 오르며 강줄기의 흐름 속으로 함께 달려가 본다. 배의 정면에서 맞받는 강바람은 드센 힘으로 밀어붙이며 순간적이나마 답답한 가슴을 바람으로 틔워준다.


시속 50Km의 쾌속정에 하얗게 갈라지는 물줄기와 튕겨 오르는 물방울은 가슴속의 응어리마저 잘게 부숴서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최고 속도를 80노트까지 달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보트의 직원에게 부탁해서 선장실을 방문했다. 시티캣의 효율성을 확인해보고 내 나름으로 멋진 보트를 한인사회에 알리고 싶다는 시민 정신이 발휘된 모양이다. 선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잘생긴 하얀 제복 차림의 선장이 경례를 올리며 환영해주었다. 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선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며 시티켓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시티캣이 속도를 내며 강 중앙의 세찬 물결을 가르니 가슴이 후련해지며 엉켜있던 속앓이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다는 게 힘이 들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 아주 간단하게 강바람에 날려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시티캣 유람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차지한 것도 없지만 맑고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서인 것이다.”라는 법정 스님의 글귀가 한 줄기 신선한 강바람과 함께 가슴에 와 닿았다. 


어느새 재의 수요일을 지내며 사순절을 맞이했다. 고대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 세례자 요한, 헤롯왕은 뗄 수 없는 인연을 만들어 왔다. 마침 제목이 ‘살로메’ 라는 연극공연이 기획된 것을 알게 되었다. 2주 전부 터 살로메 공연이 보고 싶어서 표 2장을 예약했다. 마침 딸아이와 나의 관심사가 일치를 이루었기에 같이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평소에 고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고 또 역사물을 좋아하던 터라 연출가가 살로메라는 인물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 무척 흥미로웠다. 가장 호기심이 나는 부분은 춤으로 헤롯왕을 유혹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그 여인의 춤을 얼마나 잘 묘사해 낼 수 있는가 였다. 물론 현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프린세스 극장은 작은 수의 관객들이 출연진들과 함께 호흡하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 소극장이었다. 하루에 한 번 밤 8시에 공연하는 이 연극을 보기 위해서 관람객들의 긴 줄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층이며 가끔 젊은 연인들이 팔짱을 낀 채 서로에게 기대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살로메라는 한 여인에게 주어지는 역사의 무게는 각자의 시선에 따라서 더 무거워질 수도 혹은 조금은 가벼워질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해보았다.


밤을 상징하는 어두운 무대 배경과 둥근 보름달, 그리고 안개처럼 피어나는 연기, 검은 망토로 머리부터 길게 온몸을 감싼 여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를 채우며 자신들의 사설을 시작한다. 셰익스피어 극의 대사를 외우듯 분명치 않은 발음에 소리를 질러대는 배우들의 연기에 아마추어 관객은 벌써 주눅이 들어 버린다. 


헤롯왕은 살로메 앞에 꿇어앉아서 자기만을 위해서 춤을 추어 달라고 사정을 하며 어떤 소원이라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심지어 자기 왕국의 절반을 줄 테니 자기를 위해서 춤을 추어 달라고 맹목적인 요구를 하며 매달린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대 뒤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가 영혼의 깊은 아픔을 드러내는 듯이 음산하게 들려 온다.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살로메는 사랑을 갈구하나 요한은 주님의 길 만을 강조하며 살로메의 분노를 일으킨다. 마침내 헤롯왕의 끈질긴 요구에 붉은 망토를 벗어 던진 살로메의 무용 의상은 놀랍게도 -실망의 뜻이 담긴 놀라움-에어로빅을 할 때 입는 몸에 꼭 맞는 붉은 색의 운동복이었다. 가장 기대했던 춤사위는 스트립 댄서와 같은 육감적인 동작으로 헤롯왕의 몸 위에 드러눕고 구르며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에어로빅 체조가 되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사그라지는 관심의 속도 또한 빨라졌다.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던 딸애의 고개가 점차 밑으로 꺾여진다.


잘린 세례자 요한의 목을 접시에 담아서 쳐다보는 살로메의 눈에는 사랑과 연민, 고통, 자신의 초라함 이 모든 것을 담은 채로 얼이 빠진 듯이 서 있다. 여섯 개의 검은 그림자처럼 서서히 다시 등장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좁은 무대를 가득 채우며 침묵으로 막을 내린다.


막 내린 무대의 비어있는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 세속의 욕망과 허무를 보게 한다. 어두운 무대를 보면서 저물어 간 이천 년 전의 시간을 더듬어서 만난 것 같았다.


한 동안은 40일간의 시간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또 한편으로는 강물을 헤치고 달려가는 시티캣의 힘찬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글 : 황현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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