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양식 -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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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 마태복음 6장:9절-13절
하루의 양식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천국’하면 떠오르는 첫번째 연상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영원히 사는 삶을 날마다 사는 삶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뒤이어 내일 일은 내일 염려를 하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원을 간구한다는 것은 내일 고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을 오늘 얻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원은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입니다. “하루 죽을 줄은 모르고 열흘 살 줄만 안다’라는 속담에서 처럼 하루의 의미를 건너 열흘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허영심을 금욕시키시는 내용이 주기도문에 흐르고 있습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근무하시는 소아외과 이명덕 교수가 자신의 신앙여정을 국민일보에 이렇게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전도를 몇 사람 했느냐고 물을 때면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내 손으로 직접 주님께 데려온 사람은 지금까지 아내 한 명 뿐인 것 같다. 유교와 불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내에게 결혼을 빙자(?)해 ‘예수 믿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결혼 후엔 세례도 받게 했다. 그런 아내가 더 많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교회에 냉담하던 장인도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로 모셔다 놓더니 장로까지 되시게 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다녔다. 중학교는 미션스쿨인 대구계성학교와 신명학교 외에 다른 선택이란 우리 식구에겐 아예 없었다.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살이의 고비 때마다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는 분들이었다. 당신들에게 믿음은 만사를 해결하는 비장의 무기였다. 우리집 형편을 잘 아는 분들은 우리 형제가 학업을 마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봉사하는 전문인을 꿈꾸면서 의대에 진학했다. 나는 의사가 된 후에도 찬양대(후암교회), 주말 진료, 선교합창단(대학합창단) 등 교회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유능한 의사, 유능한 교수가 내 목표, 내 우상이 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됐다. 적당한 세속주의와 최소한의 교회생활 ― 그게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그때의 나를 회고해 보면 참 끔찍하다. 참 깐깐하고, 화 잘 내고, 소리 잘 지르고, 잘난 체까지 하는 참으로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학자금 뿐 아니라 김유덕 권사님의 사랑, 양영장학회, 결혼 후의 장인, 유학시절 피츠버그대 박상종 교수님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후원과 사랑이 필요에 따라 차례로 채워주신 하나님의 선물인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잘나서 받은 상이라고 생각했다. 불타는 경쟁심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수술하고, 강의 잘하고, 환자 열심히 돌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반성도 회개도 없이 끝까지 잘나갈 줄만 알았다. 그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이 시원찮은 인간의 영혼을 건져 쓸 만한 도구로 준비시키고자 갖가지 고비, 좌절, 상처와 함께 경고 메시지도 보내셨다. 물론 나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수술 잘해 놓은 환자가 죽기도 하고, 정확한 양심적 진료라 자만했지만 환자나 가족으로부터 아주 못된 의사로 매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분해서 분노와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내 교만으로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나를 떠났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의 내 소망과 다르게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시 기도의 길로 이끄셨다. 이때를 대비해 아내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두 번씩이나 분규에 말린 교회에서 나와 충신교회에 정착한 후 아내의 믿음은 급성장했다. 나는 아내 손에 끌려 한발 늦게 새벽기도에 나가면서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주님의 은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 수술이나 처방은 이 손으로 하지만 치유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 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세상에 깊이 빠져 있던 내 죄를 고백하며 눈물 콧물로 기도를 잇게 됐다. 아내의 입에서 “찬양대 봉사해 볼까”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찬양대로 찾아갔다. 기도와 찬양이 내게 새 힘과 새 기회를 주었다. 20년 연구생활의 숙원이던 소장이식의 대성공. 목사님, 장로님, 병원 수녀님, 교우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식환자의 급성거부반응(거부반응이 나타나면 90%이상 치명적이다)도 이 분들의 중보기도로 극복할 수 있었다. 외과 영양학을 공부할 때 영양소 필요량이 ‘하루 권장량’으로 규정되는 것에 나는 ‘일용할 양식’의 놀라운 뜻을 깨닫게 됐다. 정말 큰 은사였다. 즉 우리는 한달분을 미리 먹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드디어 나를 평생 몰고 다니던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루에 한달분의 음식을 미리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그분이 가지셨던 한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균형입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파리와 개구리가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갑니다. 개구리가 말합니다."하루살이야 안녕, 내일 다시 만나..."그러자 하루살이가 의아하듯 물었습니다 "내일이 뭐야"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내일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들판이 황금물결로 물듭니다. 날씨도 싸늘해 졌습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러 가면서 말합니다. "파리야, 내년에 만나...." 그러자 파리가 말합니다. "내년이 뭐야?"파리는 따뜻한 날만 살기 때문에 겨울도 내년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의 시간과 파리의 시간과 개구리의 시간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바로 인간의 시간대를 혼돈하며 기도하는 것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시간의 허욕이란 시간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암세포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학생이 시험 전날 이 책을 언제 다보나 걱정만 하며 결국 그 귀중한 준비의 시기를 다 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학생의 죄는 남겨진 시간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땀 흘리는 이유는 내일 땀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하루에 장래의 고생을 모두 끝내려는 심정으로 사시려는 분들도 시간의 허욕에 시달리는 분들입니다. 오늘은 땀을 흘리지만 내일 그는 하루의 의미를 상실한 불한당(不汗黨)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루살이처럼 영원의 시간개념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루의 삶으로 초청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배 채움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이 하루가 열흘이 되고 일년이 되고 인생이 됩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담임목사 윤명훈, 0423 932 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