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드리는 기도 -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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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 마태복음 6장:9절-13절
자식이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이 두 공간은 하나님과 우리의 절대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과 인간의 거리를 인정하지 않는 범신론적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결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너무도 까마득히 높아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 존재의미가 무감각해 지는 우주의 어느 별처럼, 하나님이 계신 하늘 역시 무의미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대자와 인간의 거리에 ‘아버지와 자녀’라는 의미가 탄생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신 그 높은 하늘은 우리에게 ‘고향’처럼 다가오는 것이며, 인간이 사는 땅은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획득되는 이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무척 심오한 의미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호칭 속에는 ‘태어났다’라는 수동적 출생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가 낳아서 자식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낳는 법은 없습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입니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은 인간들이라는 의미가 이 칭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13절은 이 출생에 있어서 인간적 개입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믿는 절대자가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정신의 진화과정에서 벌어진 특수발달의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또한 우상론자들처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상 (human image)’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속의 ‘자녀들’은 오로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낳은 ‘하나님의 상(divine image)’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태어나는 자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에 따라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자식다움’의 능동적 성장이 있습니다. 사자가 낳아서 사자새끼이지만 그 사자새끼를 겁낼 하이에나는 없습니다. 그 사자새끼가 사자답게 자라나는 이미지 쟁취의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5장 38절-48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라에 있어서 이웃과 원수의 차별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해를 주시는 것 처럼’ 너희도 이렇게 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혹은 ‘답게 행동하는 것이다’(Today’s Korean Version)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행하였지만 자라남 혹은 됨됨이의 문제는 우리의 능동적 참여와 투쟁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는 하늘과 땅, 거룩과 죄, 선과 악처럼 소원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절대자와 인간 사이에 ‘아버지-자식’의 의미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식들이 아버지께 드려야하는 기도를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염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식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식이자 그 아버지의 상을 따라 닮아가며 ‘하나님 자녀다움’을 이루어가는 자식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인간들을 증오하셨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인간은 ‘자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노릇하며 사는 인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간! 혹은 하나님을 낳으려고 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낳으신 인간!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담임목사 윤명훈, 0423 932 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