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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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마태복음 6장:9절-13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환경보호론을 주창하는 분들 가운데 애니미즘(animism)이라는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애니미즘은 ‘물신숭배’ 혹은 ‘만유정령신앙’이라고도 번역이 되는 것 같습니다. 즉 만물은 각각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신적 존재라서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연을 파손하고 짐승들을 멸종의 위로로 몰아가는 물질세계의 질서 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행위가 된다고 합니다. 환경보호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만 애니미즘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기도문의 첫 단어가 이것을 반박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적 위치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가장 처음문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무한한 차이를 선언하는 단어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영적 존재이며 곧 신이다는 것에는 피조물과 신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숭배 혹은 예배’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숭배하는 나 자신도 ‘신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며 피조물과 하나님의 거리를 분명히 명시합니다.
우리가 자연에게서 배우고 한 그루 나무에게도 경외감을 갖게 되며 또한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야 하는 것은 그것이 ‘신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손길과 배려’ 때문입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가을날) 시편 19편의 기자는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선언하며 웅대한 자연의 침묵과 순종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선언은 그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의 첫 선언이어야 한다는 주님의 강력한 기도론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나는 왜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것입니까? 그 분의 웅대하신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왜 우리는 그분에게 기대려 하는 것입니까? 저녁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십시오.어느 족보인지도 알지 못하는 바람 한줄기에 자신의 온몸을 내어 맡기어 바람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그 잎사귀가 온 몸을 다해 하나님의 웅대하심을 따라가는 신앙으로 보이지 않으십니까? 소리를 내지 않아도 창조주를 향한 내어 맡김의 메시지를 하루 저녁 저물어 가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의 허영의 가르쳐 주고자 했던 전도서의 지혜자 5장 2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낼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라.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여라.” 이 말씀이 ‘기도는 가급적 짧게 해야 한다’든가 혹은 ‘기도는 대단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다.’라는 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기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 엎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에 계신’이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진심이시라 생각됩니다. 내가 실수하고 나약할 때에 초라함을 느끼며 ‘하나님 내가 이렇게 작은 존재입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내가 작아져서 커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크신 하나님 앞에 존엄하심을 먼저 깨달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내 기도가 압도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담임목사 윤명훈, 0423 932 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