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칼럼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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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에서는 ‘격려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Barnabas, "son of exhortation")이란 뜻이며 실상 요셉이라는 본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존재 의미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에 있어서 엄청납니다. 일례로 권혁승 교수는 바나바가 바울을 키웠다라고 평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활동 뿐 아니라 신약의 성경저술로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 신학이 그 위에서 뿌리를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가 아니었으면 그와 같은 유업을 달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바나바는 레위출신의 유대인인데 아마도 예루살렘 순례 중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설교를 강력히 전했습니다. 회심한 바나바는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았고 사도가 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나바에게서 본 위대함은 행 9:26에 나타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행 9:26-27)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바꾸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웅대하고 굵은 사랑을 세상에 설교했습니다. 바나바는 그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바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을 쓰는 법이 달라졌고, 시간을 무엇에 써야 하는지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인을 보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로 이름이 바뀌기 전 사울은 박해자였습니다. 그것도 깃발부대 선봉장이었습니다. 많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사울의 집요한 박해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때문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바꾸어 가시는 예수님을 품고 사는 바나바는 사울 속에 깃든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주님의 제자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죄인을 격려하여 거룩하고 영광되게 살아가도록 사역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빛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야 말로 우리가 세상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인을 바꾸어 놓습니다. 아니 새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를 달리 보신 그 따뜻한 눈빛이 내 안에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등불을 꺼내 놓지 않은 겁니다. 새해 우리모두 그 등불을 꺼내 바나바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0423 932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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