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과 교회 / 행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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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령이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성령님은 믿는 성도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고 논의하시는 분, 곧 보혜사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120여명의 성도들은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였습니다.
성령이 도래하시는 몇몇 기사들이 복음서에 있지만,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신자의 성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제 문밖으로 나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회개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의 탄생배경입니다. 다시말해,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통해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가시적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수 없고 오히려 과정이나 상황일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초대교회 교회는 볼 수 있고 이루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장, 혹은 교두보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세상과 차별화된 문화가 존재하였는데 그 차별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문화공동체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이 기독교 교인들이 서로 함께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보며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역사 가운데도 세상과 차별화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한말 조선사회는 일본의 침략에서만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닙니다.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들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독립신문 기록에 따르면 까닭없이 관찰사나 군수, 현령에게 끌려가 매을 맞았는데 이유가 불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근데 실상은 명분이고 돈을 주면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그리스도회보1899년 3월1일자 보도에 따르면 세도가에게 관직을 사려는 한 양반에게 북도군수 자리를 주려하자 영남고을로 옮겨달라고 청을 하였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1901년경 윤덕영이란 왕실의 한 외척이 황해도 관찰사로 제직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재물을 늑탈하자 기독교인이 항거하여 그가 관찰사직을 내놓아야했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세례교인의 숫자가 한국에 1만명도 안되었을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데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떄에, 길선주 목사님이 인도하는 이틀 저녁사경회에서 첫날은 양반과 천민이 자리를 구분하여 참석했지만, 마지막날에는 서로 구분없이 함께 앉아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주일학교 교사이자 강경보통학교 여선생 김복희씨와 학생 50여명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파직당학기도 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인지 아닌지는 뜨거운 찬양이나, 신유은사, 눈물로만 구별되지 않습니다. 사는 길로 구별됩니다. 사랑과 공의가 드러납니다. 정말이지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에 이들이 없으면 맛이 없고 어두운 소금과 빛이 됩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