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해변에서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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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주택 단지에 살고 있다. 그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는 이웃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이웃끼리 술잔을 마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과 비교하며 지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생활과 비교하곤 한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수양이 부족한 나로서는 쉽지 않다.
집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과 책을 보며 보낸다. 야외 활동은 골프와 낚시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오늘은 골프장에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하늘에 비구름이 오락가락한다. 지난 이틀간 퍼붓던 비가 그치기는 했으나, 언제라도 비가 올 수 있는 날씨다. 골프를 포기하고 가까운 바다를 찾기로 했다. 낚시 도구도 챙겼다. 비가 오지 않으면 낚시하고, 비가 오면 우산에 의지해 바닷가를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해변을 목적지로 정했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야곱의 우물(Jacobs Well)’이라는 바닷가 동네다. 야곱의 우물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시겠다며 복음을 선포한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야곱의 우물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구에서는 지금도 포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실현될 것 같지 않은 암울한 현실이지만.
집을 나선다. 번화한 쇼핑센터를 지나 사탕수수밭 사이로 길게 뻗은 도로를 달린다.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는 이곳도 머지않아 주택단지로 변모할 것이다. 골드 코스트는 호주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다.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작은 동네에 들어선다. 작은 주유소와 호주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술집(Pub)을 지나 선착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서너 명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다. 옆에는 엄마와 함께 온 아이 두 명도 낚시하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는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에게 넉넉한 미소를 보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이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나도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운다. 금방 입질이 온다. 두어 번은 미끼만 떼인 채 헛손질이다. 낚싯대 끝이 다시 찰랑거린다. 잡아채니 무언가 걸려있다. 제법 힘을 쓰는 물고기다. 도미였다. 그러나 잡을 수 있는 크기(25cm)에 조금 못 미친다. 방생(?)하고 다시 낚싯대를 바다에 담근다. 작은 도미들과 심심치 않게 씨름하고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다. 낚싯대를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주위를 걷는다. 주차장에 설치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가족 낚시 대회(Family Fishing Competition)가 이틀 동안 열린다는 포스터다. 날짜를 보니 얼마 전에 끝난 행사다. 남녀노소가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떠들썩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물론 호주 사람들 모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비큐 냄새도 주위를 진동했을 것이고.
해변에 설치되어 있는 수영장까지 걸어 본다. 지난여름에 왔을 때는 아이들로 붐비던 수영장이다. 지금은 겨울이다. 비까지 온다. 수영장 근처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수영장 둘레에는 펠리컨(Pelican)들이 떼를 지어 쉬고 있다. 물고기 잡는데 노련한 가마우지 한 마리도 펠리컨 무리 끝자락에 앉아 있다. 동료가 없어서일까, 조금은 외롭게 보이기도 한다.
선착장 근처에 있는 전망대에 가 본다. 전망대에는 비가 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낚시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비옷과 우산 등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낚시꾼들이다. 낚시를 무척 즐기는 강태공들임이 틀림없다. 내려다보이는 선착장에서는 작은 배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배에는 알 수없는 작은 상자들이 실려있다. 무엇을 잡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바다를 의지해 살아가는 어부임은 틀림없다. 조금 떨어져 있는 캐러밴 파크에는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으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는데,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척의 하우스 보트가 보인다. 배안에 서성거리는 사람도 보인다.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는 것이다. 나름의 즐거움이 있기에 선상 생활을 택했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한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싶다. 독특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전망대를 벗어나 주위를 산책한다.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비가 흩날리는 한적한 바다를 바라본다.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아름다운 호주의 바다 풍경이다. 이와 똑같은 풍경은 지구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똑같은 인간 또한 우주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채워가는 비 오는 바닷가에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말이 유독 크게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