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어긋난 풍경 속에서 발견한 삶의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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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한다. 단체 여행보다는 나만의 자동차 여행을 즐긴다.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부담 없이 원하는 장소를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식물원(Botanic Garden)은 꼭 찾아가는 편이다. 이름 모를 나무와 꽃을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식물원은 몸과 마음을 쉬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호주 전역을 자그마한 캐러밴에 의지해 다닐 때도 식물원은 빠짐없이 들렸다.
골드 코스트에 정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았던 장소도 식물원이었다. 브리즈번 시내에 있는 식물원도 일찌감치 들러 강을 바라보며 산책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브리즈번에 또 다른 식물원(Mt Coot-tha Botanic Garden)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제는 익숙한 1번 도로를 운전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브리즈번의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식물원에 도착했다. 평일이지만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많다. 주차장을 지나쳐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천천히 운전하며 언덕 끝까지 오르니 작은 주차장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전망대’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식물원 전망대를 위한 주차장이었던 것이다.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브리즈번의 빌딩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전망대 옆으로 산책로가 계속 이어진다. 숲이 우거진 식물원을 걷기 시작한다.
도시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밀림 속을 걷는 기분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커다란 나무 몸통에 탐스럽게 매달린 열매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가 아닌 몸통에 과일이 달린 것은 처음 본다. 신기한 모습이다. 명패를 살펴보니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무화과나무(Roxburgh Fig)라고 적혀 있었다. 무화과의 다양한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란다.
나뭇잎과 덩굴이 하늘을 가린 산책로를 따라 걷는 시간은 그 자체로 평온한 휴식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심호흡하며 걷는 이 시간이 좋다. 시냇물도 만난다. 시냇물을 건너니 실로폰이 산책로에 설치되어 있다. 호기심에 이끌려 건반을 두드려 본다. 음색은 다소 엉성했지만, 음정은 비교적 정확했다. 누구나 아는 쉬운 동요를 두들겨 보았다.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가는 엄마가 쳐다본다. 아이는 아는 노래임을 숨기지 않으며 미소를 짓는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아담한 일본 정원(Japanese Garden)이 나타난다. 여느 일본 정원과 다름없이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공간이다. 일본식 정자 앞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사람들은 정원을 감상한다. 물 흐르는 소리와 은은한 풀 내음이 어우러져 일본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원 한쪽에는 일본 사람들이 즐기는 분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깊은 숲에서나 볼 수 있는 고목의 풍채를 작은 화분에 옮겨 놓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옹이와 휘어진 가지에서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졌다. 화분에는 나무 생일이 쓰여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941년생이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온 나무라니, 경이롭다. 하지만 작은 화분에 갇혀 비틀리고 제대로 물조차 마시지 못하며 자라온 나무들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니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처음에 왔을 때 주차를 포기하고 지나친 주차장이다. 이곳에는 카페와 관광안내소가 자리 잡고 있다.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관광안내소를 들렀다. 안내소 입구에는 중국어, 일본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어로도 ‘어서 오세요’라고 적혀 있다. 관광안내소 규모는 작다. 안내 책자와 지도만 있을 뿐 기대했던 전시관은 없다.
카페에서 점심을 먹으며 보았던 호수를 걸어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는 연꽃으로 뒤덮여 있다. 막 피기 시작한 보기 좋은 연꽃들이다. 많은 사람이 호수 주변 벤치나 잔디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호주 특유의 여유로운 삶의 한 단면을 본다.
식물원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전망대(Mt Coot-tha Summit Lookout)로 향한다. 전망대에 오르니 브리즈번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 보인다. 전망대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인생 샷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도 멀리 보이는 브리즈번의 빌딩 숲을 사진에 담는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서니 마음조차 시원하다. 전망대 옆, 시야가 트인 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힌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모든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노시인의 읊조림이 떠오른다. 현대인의 삶이 고달픈 이유는 시야가 좁은 도시에서 살기 때문이라는 푸념이.
내비게이션을 보니 근처에 폭포가 있다. 계획에 없던 폭포로 향한다. 전망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폭포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얼마 가지 않아 ‘폭포’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폭포를 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기대했던 웅장한 모습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을 뿐이다. 실망이다. 숲길을 되돌아간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할 때가 있다. 때로는 기대 이상의 결과에 고마울 때도 있다.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실망이 크다는 것은 큰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이유로 기대 이상의 결과는 기대가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너무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삶의 굴곡은 조금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삶이라는 여정은 기대를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옛말을 되새겨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삶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