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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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굽이마다 고향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림자를 따라 산촌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내 어린 시절, 인생의 첫 문장이 시작된 마을이었다. 꿈속에서 수없이 걸었던 길,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풍경은 현실 속에서 낯선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논과 밭은 비닐하우스와 주택으로 변해 있었고, 친구들과 미역감던 개울엔 철조망이 빙 둘러 쳐 있다. 함께 웃고 떠들며 등교하던 길은 인삼 밭이 되어 사냥개가 지키고 있었고, 우리가 처음 살았던 산골집은 아스팔트길 확장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낡은 컨테이너 하나가 잡초에 묻혀, 마치 잊힌 시간의 잔해처럼 놓여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양수교를 찾았다. 자운리와 운두령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가 한 몸이 되어 석화산으로 향하는 그곳, 다리 왼편엔 우리 가족이 운영하던 국수공장이 있었다. 아버지는 미국 원조 480호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팔았고, 그 수익으로 나를 서울로 유학 보냈다. 산촌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양조장집 딸, 약국 집 아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지금은 양조장과 국수공장도, 집터도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공터가 되어 있었다.
‘민박 산장’이라는 간판 앞에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서 계셨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할머니, 이 건너편에 국수공장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할머니는 “알고 말고, 그 집은 오래전에 불타고 없어졌지”라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그렇게 민박과 식당을 겸한 산장 안에서, 나는 할머니와 일주일을 함께 지내며 산골 고향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엔 홍천까지 시외버스로 네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이제는 터널과 직선도로 덕분에 한 시간 남짓이면 닿는다. 서울로 유학 가던 날, 나는 새벽밥을 먹고 아버지가 감자 한 포대를 버스 정거장까지 가져다주셨고, 그것을 새끼줄로 메고 하루 종일 걸려 저녁 늦게 서울 창신동 친척집에 도착했었다. 지금은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산촌은 더 이상 시골이 아니었다. 농가마다 자가용과 트럭이 있고, 동네 슈퍼에서 쌀을 사면 집까지 배달해준다. 들판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고, 고랭지 채소로 부를 이룬 주민들은 서울을 이웃집 드나들 듯 오갔다. 5일장은 사라졌고 농촌의 문화생활은 도시 못지않게 다양하고 풍요로웠다.
하지만 자연은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산촌은 오대산 자락에 조용히 기대어 있던 마을이었다. 산중턱에 걸린 안개는 아침마다 태백산맥의 능선을 감추었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물소리는 마치 꿈의 전령처럼 하루를 열었다. 계곡물은 맑고 차가웠으며, 손을 담그면 뼛속까지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물은 마을을 적시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적셨다.
가을이면 들판은 옥수수 향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면 익은 옥수수 잎이 서로 부딪히며 속삭였고, 그 속삭임은 오래된 이야기처럼 귀에 머물렀다. 겨울이 오면 산은 하얀 이불을 덮은 듯 고요해졌고, 아이들은 눈길을 헤치며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그 느린 발자국 속에는 삶의 향기가 있었다. 여름이면 하지감자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감자는 생의 중심이었고, 겸손의 다른 이름이었다. 감자국에 소금 한 줌이면 한 끼가 되었고, 그 한 끼는 가족의 온기였다. 산촌은 그런 마을이었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산과 물과 흙이 사람을 품던 곳. 도시의 시간보다 느리고, 세상의 소문보다 조용했던 곳.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었다.
민박 산장에서의 저녁은 마치 어머니와 함께했던 부엌을 떠올리게 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 구수한 된장국 냄새, 그리고 삶의 굴곡을 담담히 들려주는 목소리 속에 따뜻한 시간이 흘렀다. 산장 할머니는 18살에 시집와서 까다로운 시어머니와 술을 좋아하던 남편과 함께 살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15년을 홀로 지내면서 외롭지 않게 억척같이 살아오셨다. 할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삶을 닮아 있었다. 고요한 저녁의 된장국 냄새처럼, 그 닮음은 말없이 스며들었다. 묵묵히 견디며 살아낸 날들, 시골을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고통마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태도까지—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졌다. 저녁 식사 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지난날은, 마치 어머니가 내게 속삭이듯 다정하고 조용히 마음을 울렸다.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양조장집 딸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웃고 자란 그녀 가족은 양조장 사업이 실패한 뒤 어디론가 멀리 떠났고,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 학교 친구들도 각자의 삶 속으로 흩어져, 누구 하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산장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나는 짝사랑했던 동창생을, 그리운 친구들을, 그리고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도 소개해 주셨다. 그분은 오래전 우리 집 논과 밭을 사셨던 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말끝마다 웃음을 지으셨다. 그 웃음은 세월을 품은 웃음이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그러하셨다.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면 꼭 웃으셨다. “그땐 다 그랬지 뭐…” 하시며, 아픔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였다. 할머니가 “바람 피운 서방이 손지검을 하더니 먼저 갔지!”라고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듯 말씀하실 때, 나는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며 아버지와 마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말없이 견디던 그 순간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마음의 결. 그 팔과 마음엔, 오래된 상처가 조용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늘 고향에 계셨다. 비 오는 논밭을 걸으며 나를 부르셨고, 눈 내린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현실의 고향은 많이 변했지만, 할머니를 통해 나는 내 꿈에 나타났던 고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꿈은 단지 그리움이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사랑의 흔적이었다. 그 흔적은 할머니의 삶 속에, 어머니의 기억 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조용히 살아 있었다.
고향을 떠나는 날, 첫차를 타기 위해 가방을 들고 나오자 할머니가 “가다가 밥 한술 허고 가유” 하며 손에 돈을 쥐여 주셨다. “할머니, 저 돈 있어요”라며 돌려드리려 했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오고 손자들에게 선물도 주셔야 할 텐데—며칠 묵은 나그네에게 정을 베푸신 그 마음이 잔뜩 고마웠다. 그 모습은 내가 서울로 유학을 떠나던 날, 인자하신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꿈속의 고향은 현실 속에서 다시 나를 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품에서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 이/글무늬문학사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