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다리가 놓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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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던 어느 날, 양념 불고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한인 식품점을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오래전 이민자로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뎠던 날들의 감각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간장병의 묵직한 갈색, 된장의 구수한 향기, 라면 박스가 스치는 종이의 소리까지—그 모든 것은 광야 같던 이민의 길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첫 위로였다. 그 위로는 결국 사람을 통해 이어졌고, 그때마다 내 마음에는 작은 다리가 하나씩 놓였다.
가게 사장님은 오래 알고 지낸 탈북민이다. 북한 노동성 간부부에서 일하던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 주셨다. 그의 눈빛에는 말하지 못한 상처와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가 함께 깃들어 있다.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이방인이었던 나를 품어 주신 은혜의 손길이 다시 떠오른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다리가 조용히 이어진다.
그 기억은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에서 함께했던 시간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초, 우리 교회에는 많은 탈북민과 조선족이 찾아왔다. 정착금 지원, 운전면허 시험 준비, 은행 통장 개설, 난민 신청을 돕는 일은 거창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섬김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작은 섬김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을 다시 건너가게 하는 다리가 되었다. 우리가 내민 손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내밀어 주신 손길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그 다리를 건너던 사람이었고, 어느 순간 그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은혜의 기억만으로 이민자의 현실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도 시간이 흐르며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고향의 산촌 마을을 찾았을 때 들은 농촌의 이야기는 마음을 오래 무겁게 했다. 인구 3천 명 남짓한 마을에 천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의 손길이 농촌의 수확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언어와 외모, 출신 국가 때문에 겪는 차별은 그들을 고립시켰고, 다리가 놓여야 할 자리에 벽이 세워졌다.
특히 나주 벽돌공장에서 일어난 ‘지게차 결박’ 사건은 그 벽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아픈 장면이었다. 언어 소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지게차에 결박한 그 사건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놓이지 못한 자리는 절벽이 되고, 절벽은 누군가의 하루를 추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누군가의 삶을 건너가게 할 다리가 사라질 때, 그 자리는 상처와 절망으로 남는다.
그 무거운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머무는 시드니의 일상은 또 다른 대비를 이루며 마음에 오래 남는다. 길 건너에는 중국인 가족이, 그 옆에는 인도에서 온 부부가, 오른편에는 크로아티아 이웃이, 왼편에는 아프리카 출신 가족이 산다. 서로의 식탁이나 신념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같은 거리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이 조용한 공존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놓아준 작은 다리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다.
아침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장면들은 이 동네가 품은 넉넉함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트럭에 오르는 젊은 여성, 이른 햇살 아래 정원에 물을 주는 동양인 이웃, 아랍어가 새겨진 대문을 천천히 빠져나오는 자동차. 성모상이 놓인 옆집 정원과 돌부처가 지키는 앞집 대문까지—서로 다른 문화와 신앙이 한 골목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아침 햇살이 각기 다른 피부색 위에 고르게 내려앉는 모습을 볼 때, 나는 하늘나라의 한 조각을 본다. 이곳의 다양함은 서로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배경이 되어 서로를 지탱한다. 이 또한 누군가가 먼저 놓아준 다리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두 세계의 간극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다시 질문이 떠오른다. 하늘나라의 빛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거창한 선언이나 위대한 사역이 아니라, 결국 일상의 작은 존중과 배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놓는 작은 징검돌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건너가게 하는 생명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건너온 다리와 내가 놓아야 할 다리를 함께 떠올린다.
주님, 내가 받은 다리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은혜로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징검돌을 놓게 하소서.
그 징검돌이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이 땅을 하늘나라의 빛으로 바꾸게 하소서.
그 빛을 품고 오늘도 조용히 걷게 하소서.
조 이 / 글무늬사랑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