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정지상의 <大同江대동강>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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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無情浪 대동강수무정랑
還似曾經相別淚 환사증경상별루
비 그친 긴 둑에 짙어가는 풀빛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사무치는데
무정한 듯 흘러가는 대동강 물결은
예전 이별할 때의 눈물과 다르지 않네.
대동강 물결 위에 떠도는 이별의 마음을 본다. 비가 갠 뒤의 대동강 언덕에는 봄풀의 색이 한층 짙어 있다. 들판의 흙 내음이 은은히 스며오고, 물가의 버들은 한층 더 푸르게 늘어졌다. 바로 그 자리에서 시인 정지상은 먼 길을 떠나는 벗을 배웅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이 시는 이별의 슬픔과 시간의 덧없음,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감정이 맞닿는 고요한 순간이 짧은 네 구절 속에 다 담겨 있다.
정지상(鄭知常)은 고려 인종 때의 문신 관료이자 시인(1135년 사망)이다. 그는 서경 출신으로, 척준경을 탄핵하는 등 정치 활동을 했고, 묘청 등과 함께 음양비술에 관심이 많았던 고려 12시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사람들은 그를 청련(靑蓮)이라 불렀다. 이는 그가 시를 지을 때마다 푸른 연꽃처럼 맑고 깨끗한 정취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과 재능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의 시 세계는 유려하면서도 간결하고, 한 줄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시에는 마치 수묵화의 여백처럼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있다. 그 빈 자리를 독자의 마음이 메운다. 대동강은 바로 그런 여백의 미학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시의 첫 구절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 비 그친 긴 둑에 짙어가는 풀빛”은 자연의 생명력이 넘치는 순간을 묘사한다. 비가 그치면 세상은 한결 깨끗해지고, 강둑의 풀들은 더욱 푸르게 돋는다. 그러나 그 생명의 짙은 색은 이별의 눈앞에서는 오히려 슬픔을 더 짙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자연은 생기를 되찾지만, 인간의 마음은 떠나는 벗을 보내야 하기에 쓸쓸하다. 바로 이 대조가 시의 첫 줄부터 미묘한 정취를 자아낸다. 희망의 계절 속에서도 느껴지는 이별의 쓸쓸함, 그것이 바로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던가.
둘째 구절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더욱 구슬퍼”는 시의 중심 정서를 이끈다. 남포南浦는 지금의 평양 근처,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나루터다. 예로부터 평양 사람들은 이곳에서 떠나는 이들을 배웅했다. 그래서 남포는 이별의 장소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정지상 역시 친구를 배웅하며, 자신이 울려 퍼뜨린 비가(悲歌)가 대동강 물결에 실려 멀리 퍼져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 소리는 단지 한 사람의 이별 노래가 아니라, 모든 떠남의 순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슬픔의 울림으로 변한다.
셋째 구절 “大同江水無情浪 대동강수무정랑 - 무정한 듯 흘러가는 대동강 물결은”에서 시인은 자연을 바라본다. 강물은 늘 그 자리에 흐르고, 인간의 슬픔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무정(無情)이라 말하지만, 그 말속에는 이미 정(情)의 반전이 숨어 있다.
무정하기에 더욱 정겹고, 흘러가기에 더욱 마음에 남는다. 대동강의 물결은 시인의 눈물과 함께 흘러가며, 결국 사람의 감정과 자연의 흐름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마지막 구절 “還似曾經相別淚 환사증경상별루 - 예전 이별할 때의 눈물과 다르지 않네”는 회상의 정서로 마무리된다. 정지상은 이번 이별이 처음이 아님을 말한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부침 속에서 늘 떠남과 만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대동강의 물결은 그에게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인생의 변천을 상징하는 거대한 시간의 강이었다.
눈물은 해마다 쌓이고, 그 물은 대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별의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강물처럼 이어져 세월 속에 스며든다. 결국 이 시는 한 개인의 이별을 넘어, 모든 인간의 이별에 대한 노래가 된다.
정지상의 <대동강>은 단지 아름다운 이별 시가 아니다. 그 속에 있는 고려 문학의 핵심 미학인 정경일치 情景一致, 즉 감정과 풍경의 일체가 구현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이미지로 감정을 비춘다. 풀빛, 비가, 강물,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얽혀 정지상의 마음을 대신한다. 그 절제된 표현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고려 한시의 품격이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시. 그 여백 속에 독자의 감정이 흘러 들어간다.
오늘도 변함없이 대동강은 흐른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별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대동강을 직접 바라볼 수 없더라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순간마다 정지상의 마음을 느낀다. 공항의 출국장, 병실의 문 앞, 복잡하고 아쉬운 마음속에서의 이별까지. 그 모든 보냄의 장면은 대동강 둑의 풀빛처럼 우리 마음을 푸르게 적시곤 한다.
비가 그치면 세상은 맑아지지만, 그 맑음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더 깊이 흔들린다. 정지상의 시는 바로 그 흔들림을 포착한 노래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람이 여전히 이별하고,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지상의 <대동강>은 짧은 한 편의 노래지만, 그 속에는 인생의 유한함과 감정의 영원함이 공존한다. 대동강의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그 위에 스며든 눈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에게도 아쉬움 넘치는 만남과 이별의 시간이 있다. 그때마다 밀려오는 막막함과 솟구치는 감정들은 대동강의 물결처럼 세월 속을 흐른다. 그리고 다시 삶을 그리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오늘의 삶을 이어가게 한다.
한상무/글무늬문학사랑회